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이다네크 강제수용소 (문단 편집) == 운영 역사 == 1941년 7월 [[하인리히 힘러]]는 총독부의 [[슈츠슈타펠|SS]]경찰 사령관 [[오딜로 글로보츠닉]]에게 [[소련군]] 포로를 수용하기 위한 시설을 세울 것을 위임했고 이에 따라 마이다네크 수용소가 포로 수용소로서 1941년 10월 [[루블린]]에 세워졌다. 키예프 전투 이후 소련군 포로가 급속도로 불어나면서 마이다네크 수용소는 25만까지 수용하는 거대한 수용소로 계획되었으나 [[독소전쟁]]의 격화로 폴란드의 철도망이 극도로 혼잡해지면서 도저히 25만이나 되는 포로를 단선을 이용하던 루블린 한 곳에만 보낼 수는 없었기에 5만명을 수용하는 크기에서 확장을 멈췄다. 총 236개의 막사가 있었고 각 건물에는 207명이 수용되었다. [[파일:odilo globocnik.jpg|width=250]] ↑ 루블린의 총독부 SS 경찰 사령관이자 라인하르트 작전 사령관이었던 SS 집단지도자(Gruppenführer. [[중장]]에 상응) [[오딜로 글로보츠닉]](Odilo Globočnik). 폴란드 총독부와 그 주변 [[유대인]] 200만명을 학살한 최고 실무책임자로 전후 1급 전범으로 분류되어 1945년 5월 31일 체포되었고 체포 당일 심문 직전에 입속에 물고있던 [[사이안화포타슘|청산가리]] 캡슐을 깨물어 자살했다. 1941년 말 라인하르트 작전이 시행되고 1942년 7월까지 세 개의 절멸수용소가 가동되면서 마이다네크는 성격이 조금 바뀌어 이들 절멸수용소에서 넘어온 희생자들의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의 기능도 수행했다. 하지만 폴란드 남부의 유대인 숫자가 너무 많아 해당 구역의 유대인 절멸을 맡은 [[베우제츠 절멸수용소|베우제츠]]와 [[소비보르 절멸수용소|소비보르]]만으론 모두 학살하기 벅차자 1942년 9월 마이다네크의 목재 막사 하나가 가스실로 개조되었다. 이 가스실에선 다른 절멸수용소들과 달리 [[아우슈비츠]]처럼 [[치클론 B]]가 사용되었다. 하지만 라인하르트 작전이 종료될때까지 마이다네크는 루블린 [[게토]]와 더불어 폴란드 총독부가 유대인 노동력을 마지막까지 쥐어짜내던 곳으로 절멸보단 강제수용에 좀 더 중점을 두었다. 1943년 6월 [[바르샤바 게토 봉기]]가 진압 된 뒤 약 50,000명의 유대인이 대거 마이다네크로 들어왔는데, 이들도 당장 죽음을 맞이하진 않고 죽을 때까지 노동하다 더이상 일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가스실로 보내져 목숨을 잃었다. 소수 단위로 학살했기 때문에 희생자들을 처형할 때 위장은 없었다. 그렇기에 가스 처형이 제소자들에게 그대로 목격되었다고 한다. [[파일:majdanek gas chamber.jpg|width=650]] ↑ 현재 남아있는 마이다네크의 가스실. 막사 하나를 개조했기 때문에 수용소 내의 다른 막사도 외관이 같았다. [[파일:majdanek gas chamber1.jpg|width=650]] ↑ 가스실 내부.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천장의 구멍 하나에서 치클론 B가 떨어졌다. 벽면의 파란색 얼룩은 치클론 B에 의한 가스 자국인데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도 볼 수 있다. 하지만 라인하르트 작전이 종료되고 봉기가 두려워 절멸수용소들을 폐쇄한 루블린 사령부는 점령지 최대의 유대인 노동지역 중 하나였던 루블린 일대에서도 봉기가 터질 것을 두려워해 루블린 게토를 폐쇄하고 마이다네크의 유대인을 포함, 루블린 일대의 유대인을 한번에 모조리 '''정리'''하는 계획을 고안했는데, 이것이 그 이름도 대단히 끔찍한 '수확제 작전(Aktion Erntefest)'이었다. 작전명을 고안한 사람은 역시 SS내에서도 악마로 악명높던 라인하르트 작전 검사관 크리스티안 비르트로 추정된다. 11월 3일 단 하루동안 마이다네크에 있던 18,400명의 유대인이 총살된 것을 포함 루블린 일대에서 다음날까지 총 43,000명이 SS와 우크라이나인 학살대 '트라브니키(Trawniki)'에 의해 총살되었다. 이는 홀로코스트 당시 독일군이 단일로 벌인 학살로는 가장 큰 규모인데, 국내에선 [[바비야르 학살]]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듯 하다. 다시 돌아와서, 이후에도 마이다네크는 총독부에 마지막으로 남은 절멸수용소로 1944년 3월까지 유대인 절멸을 목적으로 한 학살을 계속해서 약 6만명의 유대인이 마이다네크의 운영기간동안 학살되었다. [[파일:majdanek2.gif]] ↑ 1943년 가을 수용소 구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